이웃한 두 나라에 왕자와 공주가 살았다.
둘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한 시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둘은 두 나라 사이에 성을 짓고 식사할 때와 나랏일을 처리할 때,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항상 함께하며 서로를 보조했다. 왕자와 공주가 통치하는 두 나라는 태평성대였다. 새들은 재잘거렸고 강물은 졸졸졸 노래했다. 풀과 나무는 그에 맞춰 너울거렸고 동물들은 춤을 추었다. 백성들은 왕자와 공주를 사랑했다. 온 세상이 두 사람을 축복했고, 그 축복 속에 둘은 항상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뜨지 않는 춥고 험준한 북쪽 땅, 어둠의 땅에 살던 검은 마녀가 두 나라를 침략했다. 그녀는 사악한 저주로 빚어낸 자신의 마수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민가를 약탈하고 왕국을 짓밟았다. 삽시간에 두 왕국은 어둠의 손길에 잠식되어갔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백성들의 절규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왕국은 전례 없는 최악의 상황에 치달아 가고 있었다.
마녀와 그 하수인들의 패악을 더는 지켜볼 수 없겠다고 판단한 왕자는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으러 나섰다. 공주와 대신들은 분명 마녀에게 사악한 계략이 있을 거라며 만류했지만, 이미 마음을 결연한 왕자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왕자는 항상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이끌었고 치르는 전쟁마다 승리로 이끌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왕자의 참전으로 왕국은 빠르게 잃은 지역들을 수복해나갔다.
왕자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은 검은 마녀의 귀에도 들어갔다.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는 소식에도 그녀의 입가엔 오히려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편, 공주와 대신들은 왕자가 돌아오기 전까지 성문을 봉쇄하고 수비를 강화하기로 했다. 왕자가 빠져나간 이상, 적들과의 전면전은 어려우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견고해진 성의 수비와 외부에서 왕자의 활약 덕분에 파죽지세였던 마녀의 군대도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 조금씩 진영을 뒤로 물리던 마수 군대는 이윽고 공격을 포기하고 수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백성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 같다며 기뻐했지만, 왕자는 이 상황이 오히려 더욱 불안했다. 직접 마녀를 소탕하러 나왔건만 그가 성 밖을 나온 이래로 정작 마녀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진영 근처에 수상한 기운이 퍼져있었다는 정찰병의 보고도 그의 불안을 가중했다. 마냥 일이 쉽게 풀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왕자의 뇌리에는 그런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마녀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은 대략 보름 정도가 지난 이후였다. 마수 군단이 온갖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왕자의 진영을 향해 이동한다는 소식은 왕자의 귀에도 빠르게 들어갔다. 하지만 보름의 시간은 왕자 역시 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왕자는 빠르게 수비진을 강화했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거 적군의 수를 파악해본 결과, 거의 전군에 달하는 병력이 이번 공세에 투입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번 공격만 잘 막아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왕자와 그의 부대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적을 기다렸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마녀와 그 군대는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왕자는 혹시 모를 급습이 아닐까 생각하고 더욱 철저하게 대비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너무나도 늦은 후였다. 마수 군단의 그림자 무리는 그들을 비웃듯 느릿느릿 다가와 왕자의 진영 앞에서 조소와 함께 사라졌다.
한편 두 나라의 본성은 검은 마녀와 그녀의 마수 군단에 의해 짓밟히고 있었다. 마수 군단은 성문을 허물고 들어와 보이는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공주와 대신들, 성안에 남아있던 백성들이 최선을 다해 막아보았지만, 이들만으로 적의 전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대신들을 죽이고 공주를 납치해 자신들의 본거지인 북쪽 땅으로 돌아갔다.
왕자는 급히 병력을 철수했다. 성과 공주는 모두 멀쩡할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로. 하지만 돌아온 그들을 반긴 것은 무너진 성문과 사방에 굴러다니는 시체들, 불타고 있는 민가들과 납치된 공주의 빈 자리였다.
왕자는 절망에 빠졌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뒷수습은 부하들에게 맡겨놓고 북쪽 땅을 향해 왕자는 혈혈단신으로 공주를 찾아 나섰다.
비옥하고 따듯한 남쪽 땅에 살던 왕자에게 북쪽 땅은 너무나도 춥고 험준했다. 그는 공주를 찾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몇 날 며칠 이 척박한 땅을 떠돌았지만, 조그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가져온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점차 피폐해졌다. 왕자는 눈에 띄게 야위어갔다. 탐색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은 길어졌다. 이대로라면 왕자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를 찾겠다는 그의 진심이 하늘에 닿은 걸까. 다 죽어가던 그의 눈앞에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도착한 그곳엔 산장 한 채가 있었다. 왕자는 문고리에 매달리다시피 해 간신히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벽난로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식탁에는 육즙이 줄줄 흐르는 고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버터에 발라 쪄낸 후 으깬 감자 등 갓 차린 듯한 요리들이 가지런히 올라와 있었다. 산장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결례를 범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일단 왕자는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추후 주인이 나타나면 확실하게 사과하고 응당 대가를 지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장 주인은 왕자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금화 몇 개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보지 못 했던 것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왕자는 쪽지를 확인해보았다.
“그림자가 짙어지는 길을 찾아라. 비록 고된 여정이 될지라도 굳센 마음으로 견디어라. 오직 진심 어린 간절한 마음만이 공주를 저주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쪽지를 읽은 왕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갖고 있던 모든 금화를 식탁 위에 올려둔 후 산장을 나와 큰절을 올렸다. 이 산장 주인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비록 이 자리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다. 비로소 왕자의 눈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인 줄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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